석오연보
석오이동녕선생의 연보 제3시기
석오이동녕선생의 연보 제3시기
연도 나이 행적 대내외 역사
1919 51 1월. 동삼성 길림성에서 대종교 교주 김교헌 외 조소앙·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 이 선언문엔 박용만·신규식·신채호·이승만 등의 해외 독립운동가 39명이 총망라됨.
단군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으로 활약함.
2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로 건너가 통합적·효율적인 정부조직을 모색함.
4월 10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히선,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 됨. 이어 국호와 임시헌법, 관제를 제정하고 삼권분립 형태의 최초 자유민주공화정통의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4월 13일)
국무총리대리로 선출된 이숭만이 미국서 부임치 않아 이의 공백을 수습키 위해 국무총리로 취임.
9월, 헌법이 개정되자 내무총장으로 임시정부의 제반 기초를 바로잡음. 노동당에 이시영과 함께 참여함.
10월, 고국에 있는 청년·실업인에게 고하는 포고문을 보냄
11월, 내외동포에게 제 2차 선고문을 보냄
2월, 도쿄에서 2·8 독립선언
3월 1일, 3·1혁명이 일어남.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
강우규 의사 사이토 총독 사살기도 피체 순국.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 열림
1920 52 민족운동의 대변지인 「독립신문」을 확장개편하고 인성학교의 자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창간
봉오동과 청산리대첩
유관순 순국
1921 53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로 지명되자 사양. 이에 이동휘 일파의 임시정부 사퇴로 이동녕이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
5월, 중국내 대한민족대표의 대규모 회합인 국민대표회를 여운형·안창호·최동오 등이 발족시키자, 이에 공산주의자의 책동이 끼어 임시정부는 큰 시련을 겪음. 이동녕은 의정원의장을 사직하고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임정의 대동단결을 호소함.
인도의 간디, 반영운동 시작
미국 하와이 태평양회의에 서재필·이승만 등 5명이 참석
1922 54 7월, 국민대표회가 각 파벌간의 내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시사책진회를 이시영·조소앙·차리석·홍진·노백린 등과 조직 김규식, 러시아 모스크바 극동무산자회의에 참석
1923 55 국민대표회의 결렬 김상옥 의사, 투탄순국
1924 56 4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
6월, 군무총장을 겸임.
9월, 이승만의 장기궐석으로 대통령직권을 대행, 임시정부의 최고영도자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눈물로 호소함.
조선총독 사이토가 한인관리 홍승균을 시켜 석오로 하여금 일본으로의 귀화를 권유했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 이 때문에 선친 이병옥이 원산에서 일본고나헌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터키 케말파샤 대통령 취임
1925 57 11월, 두 번째(11대) 의정원의장이 됨으로써 임시정부의 진통기를 수습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
1926 58 8월,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됨으로써 국무령이 됨. 곧이어 법무총장을 겸임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내분으로 모든 요직을 자퇴.
1927 59 4월, 제 3차 임시헌법이 개정된 후 8월 처음으로 국무위원회 주석이 됨으로써 약화된 임시정부를 재건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결 법무총장도 역임함.
1929 61 3월, 백범 김구와 함께 민족진영의 단합체이며 정통인 한국독립당을 상해에서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추대됨. 당기관지『韓報』·『韓聲』을 발행.
10월, 세 번째(13대)로 의정원의장이 됨으로써 임시정부 최악의 시기인 존폐의 위기를 원만히 극복
1930 62 11월, 의정원 의장인데다가 다시 두 번째의 임시정부 주석(1930~1932)을 겸하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나라 최고의 중책을 짊어짐.
1931 63 만보산 사건 발생, 만주사변 발발
1932 64 석오는 임정의 국무위원제의 주석으로서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동경일천황폭살미수의거와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홍구공원(노신공원)의 壯擧를 국무원인 김구 재무장과 함께 막후에서 상세하고 치밀하게 지도
5월, 일제의 혹심한 사찰과 탄압으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절강성 가흥으로 일시 피신, 거처를 전전
6월 이후 일경의 이목을 피해 모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사임한 후 3년간 민족진영단합을 위한 정당통합운동에 몰두함.
1933 65 6월, 국무위원에 취임 활동
1935 67 11월, 세 번째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935~1939)에 취임함. 양우조·엄항섭·송병조·이시영·조성환·차이석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한 후 당수로 추대됨.
1937 69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중국 정부의 이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남경으로 이동했다가 그후 항주·진강·장사·광주·항주·계림 등을 거쳐 기강에까지 이동
5월, 한국국민당 대표의 자격으로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전시중 한민족의 진로를 모색
11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포고문을 국무위원인 자신과 이시영·조성환·김구·송병준·조완구·차이석 이름으로 내외에 발표
1939 71 10월, 노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되었으며,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내각을 구성.
11월, 서안 二府街 4호에 대한군사단(주임 조성환)을 파견
12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 2차 포고문을 자신과 이시영 조성환 김구 송병준 홍진 유동설 조완구 차리석 조소앙 지청천의 성명으로 내외에 발표
1940 72 3월 13일(음 2월 5일) 하오 4시 40분 급성폐렴으로 중국 사천성 기강현 문타만임정판공처 2층에서 정정화·연미당 등의 간호를 받으며 향년 72세를 일기로 서거.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 언급함.
유족으로 국내의 부인과 2남 3녀를 남김.
1941 3월 17일, 김구 등이 기강에서 최초의 국장으로 장례식 마침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1945 8월 15일, 민족의 광복을 쟁취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국 주석 등 환국
일본,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1948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중국 사천성 기강에서 유해가 무언환국하여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하고 서울 효창원에 안장, 오늘에 이름.
이때 석오 장례위원장은 김구주석, 경교장에서 김구·김규식·조소앙·엄항섭·신익희 등이 참석하여 식을 마친 후 장지인 효창원에 이름.
1950 아들 이의직이 6.25전쟁 중 납북(1950.8.8). 그는 1900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제 1회 졸업함. 의학박사, 광복 후 1946년 미군정시 민주의원 의원으로 피선, 그후 서울대학교 이사, 반민특위 검찰관 역임. 6.25 전쟁 발발
1962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1964 1964년 9월 29일 부인 풍산김씨 경선 여사 별세.
1894년 봄 석오와 결혼한 후 1910년 동삼성 서간도에 함께 망명 갔다가 1913년 고국으로 귀환하여 줄곧 국내에 거주함. 원산 상리교회와 서울 종로구 묘동교회 권사를 지냄.
이의식이 2남 3녀를 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