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에나 한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난 별이 바로 이곳에 내려와 천구백이년 양력 삼월 십오일에 류관순으로 태어났다. 류관순은 별처럼 밝고 총명하고 씩씩한 처녀로서 일찍이 기독교 신자이며 애국자인 아버지 류중권씨와 어머니 이씨의 교훈 아래 어려서부터 효성과 신념이 강하였고 형제와 친구에게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관순은 열네살에 서울 이화학당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성실한 모범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열일곱살이 되는 기미년 거국적인 삼일 독립 운동에 참가 했으나 무자비한 저들의 탄압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한채 고향에서 다시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지령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을의 원로들과 청년들을 동원하여 본부를 지령리에 두고 사방 백리 안팎 각 고을 사십여 마을을 포섭하는 책임을 혼자 맡고 나섰다. 때로는 여우와 범도 만나고 대낮에 장정도 꺼린다는 높은 재를 밤중에 몇개나 넘어 발이 짓물러서 촌보가 어려울 때도 있었으나 오직 찬송가와 기도로써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같이 이십 여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의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양력 삼월 그믐날 밤에 관순은 매봉에 올라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사방 여섯 고을의 원근 산봉우리에는 스물 네개의 봉화가 약속에 호응하여 두 시간이나 조요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양력 사월 일일 정오에 아우내 장터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외치는 수만명의 만세 소리가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천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순의 부모와 이십여명의 열사들은 즉석에서 저들의 총칼 아래 충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 관순도 체포되어 일본 헌병의 손아귀에서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추호도 굴하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삼년의 언도를 받았다가 법정투쟁 죄목으로 또다시 칠년의 형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천구백이십년 시월 십이일 여덟시 이십분에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열여덟해 머물렀던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별은 오늘도 이 하늘에 떠있어서 영원한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이 곳은 사적 제 이백삼십호로 지정되었고 천구백육십삼년 구월에 비를 세웠는데 천구백칠십육년 시월 이십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뜻깊은 유적을 정화하고 정성으로 보호하라는 뜻을 받들어 천구백칠십칠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 비를 다시 세우고 봉화탑을 새로 쌓고 추모각과 매봉교회를 보수하여 성스럽게 수호하게 되었다.)
서기 일천구백칠십칠년 팔월 일일 세우다.
박 화 성 짓고, 이 철 경 쓰다.
※ 위 비문은 1977년 8월 1일에 제작되었으며 제작 당시 비문에 쓰여진 그대로를 옮겼다. 유관순열사의 생애가 짧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집마저 불타 열사와 관련된 자료가 없는 실정이라 그동안 열사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유관순열사의 전기나 영화 등에 묘사된 것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유관순열사의 연구에 진척이 있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생년월일, 순국일 등이 밝혀졌다. 또한 한글맞춤법이 바뀜에 따라 이에 대한 오류도 볼 수 있다. 아래의 문안은 새롭게 밝혀진 사실과 한글맞춤법에 맞도록 내용을 수정해본 것이다.
천년에나 한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난 별이 바로 이곳에 내려와 천구백이년 양력 십이월 십육일에 유관순으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별처럼 밝고 총명하고 씩씩한 처녀로서 아버지 유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씨의 교훈 아래 어려서부터 효성과 신념이 강하였고 형제와 친구에게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관순은 1915년에 서울 이화학당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성실한 모범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열일곱되는 기미년 거국적인 삼일독립운동에 참가 했으나 무자비한 자들의 탄압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한채 고향에서 다시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지령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을의 원로들과 청년들을 동원하여 본부를 지령리에 두고 사방 백리 안팎 각 고을 사십여 마을을 포섭하는 책임을 혼자 맡고 나섰다. 때로는 여우와 범도 만나고 대낮에 장정도 꺼린다는 높은 재를 밤중에 몇 개나 넘어 발이 짓물러서 촌보가 어려울 때도 있었으나 오직 찬송가와 기도로써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같이 이십 여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의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이월 그믐날 밤에 관순은 매봉에 올라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사방 여섯 고을의 원근 산봉우리에는 스물 네개의 봉화가 약속에 호응하여 두 시간이나 조용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음력 삼월 일일 정오에 아우내 장터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외치는 수만명의 만세소리가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천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순의 부모와 이십 여명의 열사들은 즉석에서 저들의 총칼 아래 충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 관순도 체포되어 일본헌병의 손아귀에서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추호도 굴하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삼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천구백이십년 구월 이십팔일 여덟시 이십분에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열여덟해 머물렀던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별은 오늘도 이 하늘에 떠있어서 영원한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이 곳은 사적 제 이백삼십호로 지정되었고 천구백육십삼년 구월에 비를 세웠는데 천구백칠십육년 시월 이십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뜻깊은 유적을 정화하고 정성으로 보호하라는 뜻을 받들어 천구백칠십칠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 비를 다시 세우고 봉화탑을 새로 쌓고 추모각과 매봉교회를 보수하여 성스럽게 수호하게 되었다.)
서기 일천구백칠십칠년 팔월 일일 세우다.
박 화 성 짓고, 이 철 경 쓰다.
유관순 열사유적인 생가지는 봉화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초가집은 빈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소설가)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자리한다.
정의의 상징이 나라의 딸 유관순 그대 매봉에 올라 높이 들었던 봉화 여섯 고을 스물넷 산봉우리 마다 내일을 약속하며 같이 타오른 봉화들 이 길로 가야 자유가 있고 이 길로 가야 평화가 있고 오직 이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애타게 일러준 거룩한 봉화였네 그대 손에 들렸던 그 정열의 봉화 민족의 끓는 피로써 기름을 삼았기에 악마의 풍우 속에서도 꺼질리없었고 오늘은 역사의 제단에 이리도 화사로이 무궁화 꽃송이처럼 피어오른 봉화라 영원히 겨레의 가슴 가슴에 타오르리라 타오르리라
일천구백칠십칠년 칠월
이은상 글, 김기승 씀.
※ 위 비문은 1977년 7월 제작되었으며 제작 당시 비문에 쓰여진 그대로를 옮겼다.
봉화지는 생가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봉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의거 전날 밤(3월 31일),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1977년 10월 12일 터만 남아있던 이 곳에 봉화탑(5.6m)과 봉화대를 건립했다. 봉화탑에는 이은상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봉화탑 찬가가 새겨져 있다.
柳寬順烈士 止墓 열사의 관향(寬鄕)은 고흥 류(柳)씨이며 중시조 류태우(柳泰宇) 10대손으로 이곳 아우내 기미독립만세운동 의거에서 순국하신 류중권(柳重權)선생과 이소제(李少悌)여사의 5남매 중 둘째딸로 1902년 3월 15일 천원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다. 1919년 4월 1일 이화학당 학생(17세)의 몸으로 서울 3.1 독립선언에 참가한후 고향에 돌아와 아우내 독립만세 주역으로 선봉에서 강열한 항쟁을 전개하다 왜(倭) 관헌에 체포되어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 끝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항거를 거듭하다 1920년 10월 12일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섯토막으로 찢기어 순국하시니 고금에 유례없는 구국의 독립투쟁 열사이시다. 잔인무도한 왜(倭) 관헌에 의하여 시신과 묘소마저 흔적없이 파헤쳐진채 오늘에 이르렀다. 순국후 69년과 3.1독립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의거의 현장 이곳에 겨례의 이름으로 정성을 모아 초혼묘를 모시고 고히 잠드시기를 삼가 비노라.
語錄文 나는 대한사람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너희들은 나에게 죄를 줄 권리가 없고 나는 너의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재판을 거부하며) 선생님! 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했읍니다. 2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박애덕 선생님에게... 옥중에서) 소녀 유관순열사의 기원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읍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주시고 이땅에 자유와 독립을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소녀 유관순열사의 기원
매봉에서
奉 安 殉 國 69周 1989年 10月 12日 建立
柳寬順烈士 紀念事業會
委員長 : 金 在 鴻
※ 위 비문은 1989년 10월 12일에 제작되었으며 제작 당시 비문에 쓰여진 그대로를 옮겼다. 유관순열사의 생애가 짧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집마저 불타 열사와 관련된 자료가 없는 실정이라 그동안 열사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유관순열사의 전기나 영화 등에 묘사된 것들이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유관순열사의 연구에 진척이 있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생년월일, 순국일 등이 밝혀졌다. 또한 한글맞춤법이 바뀜에 따라 이에 대한 오류도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시신은 이화학당으로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과 스승, 동문들에 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고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도시개발로 망우리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묘가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이 편히 잠드시도록 매봉산 중턱에 초혼묘를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서울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내 이태원 묘지 무연분묘에 합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1920년 9월 28일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신 유관순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초혼묘를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0년 4월 1일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석으로 건평 22.05㎡, 높이 4.2m 이고, 비문은 김재홍이 썼다.
봉화지는 생가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봉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의거 전날 밤(3월 31일),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1977년 10월 12일 터만 남아있던 이 곳에 봉화탑(5.6m)과 봉화대를 건립했다. 봉화탑에는 이은상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봉화탑 찬가가 새겨져 있다.
화강석의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두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신응수 대목장이 건축을 맡고,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서예가가 썼다. 추모각에 모셔진 유관순 열사의 영정은 석천 윤여환 화백의 작품으로 2007년 2월 28일 봉안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의 순국일에 이 곳에서 추모제를 거행한다.
석천 윤여환 화백이 제작하여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다.
1986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기존의 영정은 폭행과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 있는 유관순 열사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을 토대로 그려져 실제 얼굴과 나이와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다. 새로 제작한 유관순 열사의 영정은 이화학당 재학시절 사진과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 등을 분석하여 제작에 반영했으며, 사진 분석을 통해 추가로 찾아낸 속쌍커풀 등도 표현했다. 얼굴은 안면근육의 조직을 선과 점을 따라 표현하는 조선 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을 활용하여 피부질감과 색감을 최대한 살렸다. 유 열사의 자세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서 태극기 쥔 손을 무릎에 올려 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룻바닥 등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했다. 영정 제작을 위해 재현한 치마저고리와 갖신은 현재 유관순열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2월 28일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2년 착공, 2003년 4월 1일 개관했다.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자료를 전시하고, 실감미디어를 통해 당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유관순 열사의 제적등본,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판결문 등의 기록자료를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으며, 서대문형무호의 여옥사 8호를 재현한 전시코너에서는 8호 감방의 노래가 울려퍼지며,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를 외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전시실의 후반부에는 나라사랑 아카이브가 마련되어 있어 교과서, 도서, 기념주화, 우표 등의 현대자료가 전시되어 오랜 세월동안 3.1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에게 사랑받아온 유관순 열사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관람하며, 유관순 열사의 불꽃같은 삶 속에 녹아있는 자유와 평화를 향한 간절한 외침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다.
한국의 딸 유관순은 우리민족 정기의 화신이다. 일천구백십구년 기미 삼월 일일 어린 여학생의 몸으로 태극기를 높이드니 여섯 고을이 향응하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니 왜적의 총칼이 보이지 않아 아우내 장터가 피로 물들었다. 왜병에게 잡힌몸이 되었으나 자유를 굳게 주장하여 왜적의 재판을 거절하니 적의 법관도 크게 놀랐다. 칠년의 최고형을 받고 옥중에서도 용감히 투쟁하다가 마침내 피살되니 그때 나이 겨우 열여덟 아아 슬프다 인간의 생에는 비록 짧으나 천상의 성녀로서 거룩한 그 정신은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리로다....
서기 1983. 10. 12
유제한(柳濟漢)이 글을 짓고
인영선(印永宣)이 글을 쓰고
이종각(李鍾珏)이 조각하다.
3.1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유관순열사사적지 광장 내에 건립하였다. 조각가 이종각 작가의 작품이다. 동상 뒷면에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는데 시는 유제한, 글씨는 인영선이 썼다.
호국충절의 고장 천안을 상징하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천안 시내 진입로 한가운데에 높이 11.2m의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 천안 시민과 관광객에게 유 열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건립했다. 한 손에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다른 손에는 주먹을 불끈 쥔 당당하고 결의에 찬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투사들의 독립을 향한 열정을 부조로 표현한 부속 작품은 길이 8m, 너비 1.6m의 스테인리스 스틸과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유관순열사사적지 진입로에는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과 전시물을 설치하고, 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 벤치와 조경수를 심어 작은 공원과 같은 열사의 거리를 조성했다. 관람객의 쉼터이자 유관순 열사의 숨결과 나라사랑 정신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정신과 넋을 추모하는 청소년과 교사들의 글을 새긴 비석으로 유관순열사사적지에서부터 초혼묘까지 25곳에 세워져 있다.
순국자 추모각 광장 아래 위치한 유관순열사 기념공원은 태극광장을 중심으로 파고라(등나무 쉼터)와 벤치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공간이다.